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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 Guide&Digest

천년고도` 나주

실학자 이중환택리지에서 ‘금성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영산강이 흐르니 도시의 지세가 한양과 비슷하고, 예부터 이름난 인재가 많이 난 곳’이라고 적고 있다. 나주엔 예부터 2가지 배가 있었다. ‘먹는 배’와 ‘타는 배’. ‘먹는 배’는 그 너른 들녘에서 고단한 노동을 달게 하던 ‘꿀’이었다. 여전히 입맛을 사로잡는 과일이다. 하얀 속살은 우리 민족의 색깔이요, 고유 정서로 다가온다. 그런데 ‘타는 배’는 산업화·근대화라는 탐욕스런 가치를 만나 서럽게 퇴출됐다. 영산강에 거대한 둑이 가로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그 배는 언제나 나주의 지평을 열어준 통로였다. 서남해를 호령하고, 들판 가득한 하얀 쌀로 국운을 쥐락펴락하던 나주의 권위도 배를 빼놓고 운위할 수 없다. 나주가 그 배를 다시 띄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옛날 영화를 되찾기 위해 수년 전부터 영산강 뱃길 열기 사업을 펴고 있다.2~3년 후면 목포~영산포 사이 70㎞ 뱃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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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릿한 메시지 ‘생생한 나주의 역사”

타임머신을 타고 1,000년 전까지만 거슬러 가보자. 그 이전에도 나주는 마한문화의 중심지였다. 백제·신라와 독립적으로 600년 이상 존속된 마한은 세계에서 가장 큰 옹관(항아리 관)을 만들어내는 등 수준 높은 문명을 갖고 있었다. 나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러브 스토리’ 하나로 역사의 무대에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놓고 있다. 후고구려왕 궁예의 명령으로 나주지역을 차지하러 온 왕건과 버들낭자가 그 주인공. 왕건은 영산강을 따라 올라와 후백제의 견훤과 ‘금성산 싸움’을 벌이게 된다. 서기 911년. 이때 왕건은 17세 연하인 버들낭자를 만나면서 열렬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나주시청 정문 앞 300m 지점에 완사천이란 샘터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왕건이 전황을 둘러보러 왔다가 한 여인한테서 ‘버들 잎 띄운 물’ 한 바가지를 얻어먹은 것이 인연이 됐다. 남도를 들르는 연인이라면 꼭 들러 가는 장소다. 당시 왕건은 전투를 마치고 목이 말라, 완사천에 들러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뜻밖의 로맨스로 버들낭자는 고려 2대 왕 혜종이 될 무를 잉태하게 되고, 그는 나중 장화왕후가 된다.

역사의 중심으로 ‘목사골’ 나주

고려 성종 때인 998년 나주는 지금 광역자치 단체에 해당하는 ‘목(牧)’이 됐다. 나주·전주 등 전국 12개 주요 고을이 그랬다. ‘목사골’이 된 것이다. ‘전라도’라는 고유명사는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뒤이어 병마절도사가 주둔했다. 이때부터 나주는 도시다운 도시로 하나하나 단장되기 시작했다. ‘목(牧)’의 지위는 1895년까지 누렸다. 그동안 나주는 세종 때 한글창제를 도운 신숙주, 거북선을 발명한 나대용, 천재시인 임제 등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을 수두룩하게 낳았다. 조선 성종 때 ‘로빈슨크루소 표류기’보다 흥미진진하다는 ‘표해록’을 지은 최부도 이곳 출신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1929)의 기폭제가 된 ‘댕기머리 사건’도 났다. 나주에서 광주로 오가는 통학기차 안에서 일본 학생이 우리 여학생 머리채를 당긴 일이 독립운동으로 발화됐다. 등교 후 바로 광주에서 불이 붙은 일본타도 시위는 한반도는 물론 북간도까지 들불처럼 번져갔다. 진원지인 죽림동에 나주역사가 보존되고 있다.

다시 일어서는 전라도 맏고을

나주는 조선말까지만 해도 서울 도성과 같은 사대문과 객사, 동헌 등을 고루 갖춘 전라도의 대표적인 석성(石城)이었다. 둘레가 3.7㎞, 면적은 97만 2,600여㎡가 됐다. 중세시대의 성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0~15년 사이 일제가 멋진 중세시대 도시 하나를 무참히 허물어버렸다. 1993년 남문인 남고문을 시작으로, 2006년 동문인 동점문이 복원됐고, 2010년 말 서문인 서성문이 다시 태어난다. 북문인 북망문도 2011년까지 세울 계획이다. 목사가 일을 보던 금성관(객사)도 본모습을 찾았고,2010년 말까지 금계매일시장을 옮겨 동헌, 향청, 이청 등 관아를 복원한다. 또 일제 강점기 당시 내륙 침탈의 전진 기지였던 전남 나주의 영산포 선창 일대가 ‘근대 역사의 거리’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곳은 옛 영산포 선창에서 정미소까지 750m에 일본식 가옥 등이 남아 있다. 이웃에 나주의 명물 ‘홍어의 거리’가 있다. 광주 쪽인 금천·산포면 일대에 2012년까지 나주의 위상을 한 단계 올릴 명품도시 하나가 탄생한다. 면적 7,315㎡(221 만평)에 공기업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한국전력공사 등 16개 기관이 들어서는 ‘빛가람 혁신도시’ 공사가 한창이다.

옛 포구의 영화, 영산포 홍어축제로 이어져

유채꽃으로 노랗게 물든 4월 영산강변에서 영산포 홍어축제가 열린다. 한 때 돛배가 드나들고 고깃배로 불야성을 이뤘던 호남 최대의 포구였지만 1981년 하굿둑이 막힌 후 뱃길이 끊겼다. 마지막 홍어배가 포구를 떠난 것은 1977년 10월이다. 이후 ‘불 꺼진 항구’가 됐으나 홍어와 젓갈 집산지로서의 유명세는 이어지고 있다. 홍어는 톡 쏘는 맛과 암모니아 냄새를 매력으로 꼽는다. 처음 적응할 때 고비가 있지만 몇 번 먹다보면 어김없이 마니아가 된다는 음식이다. 전라도 사람들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음식 가짓수가 많아도 홍어 없으면 잔칫상으로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홍어를 높게 친다. 고려 말 때 왜구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시행된 ‘공도(空島)정책’에 따라 흑산도 사람들이 나주로 피신하면서 홍어를 전한 것으로 돼 있다.

즐길거리, 먹거리가 풍부한 나주고을

10월 나주 금성관 일대에서 선보이는 나주 영산강 문화축제는 나주 역사와 농경생활 전모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직접 체험을 통해 역사와 전통을 경험해볼 수 있어 전국의 가족 관광객이 몰린다. 마한의 추수감사제인 ‘소도제’를 시작으로 왕건과 장화왕후 궁중혼례, 삼현육각 공연, 나주목사 부임행사 등이 성대하게 꾸려진다. 디딜방아와 홀테, 도리깨질을 해보고 떡메를 쳐보고, 소달구지를 타면서 농경사회의 풍습을 느껴볼 수 있다.

나주목사 내아에서 하룻밤을 묵는 체험행사도 성황을 이루고 있다. 6개 방 수준에 따라 숙박료가 5만원에서 15만원이다. 공산면 영산강변 산 언덕 14만㎡에 들어선 나주영상테마파크엔 늘 인파가 몰린다. MBC 드라마 ‘주몽’, KBS 드라마 ‘바람의 나라’ 촬영지다. 고대 건축과 성곽 등을 볼 수 있고, 장군놀이·활쏘기·보초체험 등을 할 수 있다. 3분 거리인 강변에서 황포돛배를 탈 수도 있다. 다야뜰나루~영산나루 6㎞를 오간다. 어른 5,000원, 청소년 4,000원. 이어 10분 거리인 다시면 회진리 강변에 있는 나주시천연염색문화관이 들어서 잇다. 200명이 동시에 작품을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관, 콘도형식으로 된 게스트하우스, 상설전시관, 제품판매장, 교육세미나실, 연구실 등을 갖춘 명실 공히 국내최대 규모다.

대표 음식으로는 나주곰탕, 영산포 홍어를 들 수 있다. 양지와 사태를 주로 쓰고 삶은 과정에서 차별화하는 비방을 쓴다. 금성관 주변을 중심으로 식당가가 들어서 있다. 영산포 홍어는 4~5년전만 해도 식당이네댓 개 밖에 되지 않았으나 10여 개로 늘어났다. 홍어를 파는 상회를 겸하고 있다. 홍탁(홍어+막걸리+묵은지)도 맛있지만, 나주에서만 볼 수 있는 홍어애보릿국이 진미다. 소설가 황석영이 홍어를 처음 먹은 후 토해낸 “참으로 이것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혀와 입과 코와 눈과 모든 오감을 일깨워 흔들어 버리는 맛의 혁명”이라고 한 말이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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