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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청나라 말 최고 통치자]

서태후


서태후는 광서제가 1898년 6월부터 캉유웨이(강유위)의 의견을 수용하여 일으킨 일련의 개혁운동을 배은망덕이라고 여겼다. 광서제를 황제로 만든 것은 서태후 자신이었다. 황제로 만들어주고 친자식에게도 허용하지 않았던 친정까지 허락하였더니 믿는 도끼도 못 되는 것이 발등을 찍는다고 서태후는 생각했다. 그러나 광서제는 너무 허약한 도끼였다.

그는 서태후의 발등을 찍기는커녕 자신의 발등을 내려찍고 말았다. 서태후와 보수파를 제거하기 위해 위안스카이(원세개)의 군사력을 움직이려 했던 광서제는 배신당했다. 위안스카이는 황제의 계획을 그대로 서태후에게 고해바쳤다. 기회를 노리던 서태후는 1898년 9월 광서제를 자금성의 영대에 유폐시키고, 변법자강을 주도하던 개혁파를 검거하는 무술정변(무술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술정변이다)을 일으켰다. 그리고 정치 일선에 다시 나서 청나라를 쥐고 흔들었다.

19세기 말, 서태후는 황제는 아니었지만,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며,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20세기도 아니고 19세기에, 거기다 남성중심의 유교국가 중국에서 여성이 47년 간 통치자였다는 사실은 서태후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매우 탁월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서태후가 집권할 당시 청나라는 대내외적으로 복잡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외적으로는 서구열강이 호시탐탐 중국 땅을 노렸고 내적으로는 250여 년 간 만주족의 지배를 받던 한족들이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면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중국역사상 가장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시기였을지도 모를 19세기 말,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의 행보가 이후 중국의 운명을 일부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서태후는 1835년 안휘성의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만주족이었고 성은 예흐나라, 어렸을 때 이름은 행정 혹은 행아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서태후의 어린 시절은 매우 빈곤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애인 영록을 버리면서 까지 궁녀가 되고 싶어 했다. 1851년 16세에 궁녀가 되어 자금성에 들어간 서태후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욕심 많고 진취적이었던 서태후는 궁녀 이상의 그 무엇을 원했다. 젊음과 미모가 있었고 거기에 더해 묘하게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말솜씨가 있었던 서태후는 함풍제 주변 환관들의 환심을 샀고 곧이어 황제의 눈에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황제의 유일한 혈육을 낳았다. 아들이었다. 이것은 하늘이 그녀에게 준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서태후는 일개 궁녀에서 일약 귀비로 뛰어 올랐다. 서태후는 이 지점에서 더 큰 야망을 꿈꾸기 시작했다. 귀비가 되어 황제의 옆에 있다 보니 나라의 정사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저 황제의 후궁으로, 황태자의 모후로 얌전히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던 서태후는 때때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함풍제는 그녀의 마음에 담긴 야망을 알아차리고 이를 무척 경계하였다. 유일한 혈육의 어머니인 서태후가 훗날 폭주할 것을 두려워한 함풍제는 그녀를 죽일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60년 서구 열강의 북경 침범과 피난 과정에서 함풍제는 31세에 요절하고 만다. 유일한 후계자인 황태자의 어머니 서태후. 그녀의 6살 난 아들이 동치제로 황제가 되자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수렴청정은 함풍제의 정비인 동태후와 같이 했지만, 그다지 정치에 관심이 없고 문맹이었던 동태후는 서태후에게 정치전반을 맡겼다. 이때 서태후는 비로소 ‘서태후’ 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황제의 궁을 가운데 두고 동태후와 서태후의 거처가 동쪽과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수렴청정 초기 서태후는 황족인 공친왕과 연대하여 청나라의 자강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제도와 인사 개혁을 통해 한족들에게도 기회를 주었고 태평천국의 난도 완전히 진압하는 등 부국 자강운동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다. 후세에서는 이시기를 동치중흥이라고 하기도 한다.

동치제를 허수아비로 두고 발 뒤에서 실제로 중국을 다스렸던 서태후였지만 그녀의 권력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녀가 중국을 다스릴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고맙고도 고마운 존재, 바로 아들 동치제가 언젠가는 반드시 권력을 빼앗아갈 정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은 황제가 성장하여 친정을 하게 되면내주어야만 했다. 아들의 성장을 대견스러워 해야 할 어머니로서는 절대 가져서는 안될 생각이 서태후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권력욕 앞에서는 아들이든 아니든 다 자란 황제는 무조건 눈의 가시였던 것이다. 게다가 동치제는 생모인 자신보다 후덕한 동태후를 더 따랐고 황후도 동태후의 가문에서 골랐다. 지방의 몰락한 관리의 딸인 서태후가 쉽게 다룰 수 없는 명문가 출신의 며느리인 황후는 눈엣가시였다. 언젠가 황제가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할 때쯤 황후의 가문은 득세하고 자신은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될 것은 보지 않아도 훤한 일이었다.

서태후는 며느리인 황후와 황제 사이를 갈라놓고 끊임없이 황후를 구박하였다. 또한 황제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려 환락에 빠져들게 하였다. 동치제는 서태후의 사주를 받은 환관의 손에 이끌려 궁궐 밖 홍등가에 드나들었다. 열락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던 황제는 마침내 몹쓸 병에 걸린다. 황제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서태후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미 동치제는 아들 이전에 권력을 뺏으려는 라이벌이었다. 서태후는 동치제가 치료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죽어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황제가 죽고 나자 아이를 가진 황후를 구박하여 자살하게 만든다. 서태후의 눈에는 황후의 뱃속에 든 아이마저도 손자라는 애틋한 마음보다는 미래의 경쟁자이기에 없애버려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권력 앞에 모성애마저 버린 비정한 어머니, 서태후는 동치제를 이을 다음 황제로 함풍제의 동생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난 광서제를 골랐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큰어머니이자 이모였다. 즉위 당시 광서제의 나이는 불과 네 살이었다. 여타 성인 황족들을 물리치고 구태여 네 살의 광서제를 황제로 고른 것은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통해 계속 중국을 다스리겠다는 의지 표명에 다름 아니었다. 광서제는 친아들마저 희생시킬 수 있는 비정한 서태후에게 주눅 들어 기 한번 펴지 못하고 자랐다. 황후의 간택에도 마음에 둔 여인이 따로 있었지만 결국 서태후가 골라준 서태후 가문의 여인을 황후로 맞아야만 했다.

1889년 서태후는 동치제와 광서제에 이은 오랜 수렴청정 끝에 광서제를 결혼시키면서 뜻밖에 황제의 친정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자금성 북쪽에 새로 지은 이화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외형상으로는 광서제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뒤로 물러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상’ 일 뿐이었다. 이미 궁궐과 조정에는 서태후의 사람들뿐이었고 광서제는 자주 이화원으로 문안인사를 가서 서태후에게 국정을 보고하고 지시 받았다.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끝낸 것은 이미 수렴청정이라는 형식이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발을 드리우건 걷어버리건 중국을 통치 하는 것은 광서제가 아니라 서태후였고 그녀는 황제 위의 최고 권력이었다.


그러나 명목상이든 허수아비든 간에 중국의 황제는 광서제였다. 이제 어엿이 성인이 된 광서제는 자신의 나라를 자기가 직접 통치하고 싶었다. 서태후의 전횡으로 기울어가는 청조도 광서제에게는 큰 걱정이었다. 광서제는 청일전쟁을 통해 황제의 좁은 입지를 벗어나보려 했다. 그는 서태후를 졸라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예상 외로 강했다. 거기에다가 청일전쟁에서의 승리가 광서제의 입지를 넓혀주는 계기가 될 것을 두려워한 서태후의 방해 공작도 있었다. 서태후는 전쟁 중에 군비의 일부를 빼돌려 이화원을 치장하는 데 썼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어이없는 패배로 끝이 나고 청나라는 세계 만방에 자신들의 국력이 형편없음을 알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열강의 압박은 심해졌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분위기가 청나라 지식인 사회에서 형성되었다. 광서제는 이 지식인층의 새로운 분위기에 적극 동조했다. 그들의 의견을 수용함으로써 나라도 부강하게 하고 서태후로부터 벗어나보자는 것이 광서제의 속셈이었다. 캉유웨이, 링치차오(양계초)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 학자군이 시대에 맞지 않는 법과 제도를 고쳐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취지로 변법자강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운동은 서태후와 그녀를 둘러싼 보수파들에 의해 번번이 방해를 받았다. 서태후 세력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개혁파와 광서제는 당시 군부세력으로 뜨고 있던 위안스카이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겉으로는 개혁파에 동조하는 척 할 뿐 뿌리 깊게 이해타산을 따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쪽이 어디일까 주판알을 튕겼고 서태후를 선택했다. 그는 서태후의 애인 영록을 찾아가 광서제의 모든 계획을 낱낱이 고발했다. 그렇지 않아도 광서제와 개혁파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던 서태후는 이때를 기회로 삼았다. 그녀는 광서제를 자금성 영대에 유폐시켜 버리고 그를 도와 변법자강에 나섰던 지식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캉유웨이를 비롯한 일부는 해외로 망명하여 목숨만은 건졌지만, 어쩌면 청조의 마지막 시도였을지도 모를 변법자강운동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 무술정변 후에 모든 견제 세력이 사라진 조정에 서태후의 독무대가 차려졌다. 비록 명분상으로는 수렴청정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지만, 서태후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정치에서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였던 만큼 그녀는 어린 시절의 가난에 복수라도 하듯 사치를 즐겼다고 한다.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은 중국 역사상에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먹는 음식은 한 끼에 128가지나 되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백은 100만 냥이었다. 이것은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 치의 끼니에 해당하는 정도의 금액이었다. 옷은 3000여 상자나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고 다녔고 특히 보석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였다. 언제나 비취와 진주로 머리 장식을 했으며. 비취 구슬과 진주를 매단 옷을 입었다. 비취 팔찌, 비취 반지뿐 아니라 손톱에까지 비취 보호판을 달았다. 식탁도 비취로 만든 식기들로 차리게 했으며, 비취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게 하였다.

서태후가 부린 사치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바로 현재까지도 중국의 대단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이화원이다. 서태후는 청일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려 자신의 처소인 이화원을 치장하였다.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 중에도 오로지 처소 꾸미기에 급급했던 서태후의 배짱은 크다면 크고 달리 보면 황당하기까지 하다. 이화원은 현재까지도 그 화려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데, 특히 인공으로 파낸 호수는 마치 바다와도 같다.국가 최고 권력에 오른 서태후에게 황제의 후궁으로서 지켜야 할 정절 같은 건 콧방귀꺼리도 되지 않았다. 함풍제가 죽고 27세에 젊은 과부가 된 서태후는 권력을 잡자마자 고향에 버리고 온 애인, 영록을 불러들였다. 영록은 평생의 그늘 속 애인으로 머물면서 그녀의 사치와 향락을 뒷받침하였다. 서태후는 영록 외에도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남자를 취했고, 수시로 갈아치웠다고도 한다.

그 어떤 정적도 두렵지 않고 외세의 압박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철의 여인 서태후도 이겨내지 못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월이었다. 그녀도 나이 들어 노쇠해졌고 극심한 사치와 향락은 노인에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몇날 며칠 동안 계속된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너무 많은 음식을 먹은 서태후는 이질에 걸린다. 그보다 며칠 앞서 10년간 유폐되어있던 광서제는 위안스카이가 보낸 보약을 먹고 3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위안스카이가 보낸 약은 보약이 아니라 독약이었다. 광서제의 죽음을 전해들은 서태후는 매우 담담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역시 독단으로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의 불과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했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였다. 세 살짜리 부의를 선택했을 때 서태후는 곧 병을 털고 일어나 수렴청정을 이어갈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노령은 이질을 이기지 못했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살아생전 그토록 핍박했던 조카를 따라 유명을 달리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다시는 여자가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서태후의 죽음과 함께 청조도 곧이어 망하고 말았다. 1911년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쑨원(손문)을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탄생하고 중국은 새로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서태후가 만든 보수적인 정치 풍토는 새롭게 다가오는 서구 세력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했고, 황실과 주변 귀족의 사치와 향락은 백성을 몰락으로 이끌었다. 서태후 사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중국은 서구열강의 손아귀에서 농락 당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여태후 한고조의 황후로 고조가 죽고 난 후 수렴청정을 하며 정권을 장악
측천무후 당고종의 황후였다가 스스로 주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됨
천추태후 고려 경종의 왕비, 목종의 어머니로 수렴청정을 하며 정권을 휘두름
문정왕후 조선 중종의 왕비로 아들 명종초기에 수렴청정을 하며 정권을 장악
정순왕후 조선 영조의 왕비로 순조시대에 수렴청정을 하며 정권을 장악

함풍제 청나라 9대 황제. 서태후의 남편
동치제 청나라 10대 황제. 서태후의 아들
광서제 청나라 11대 황제. 서태후의 조카
선통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홍슈취안(홍수전)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주도자
캉유웨이(강유위) 변법자강운동의 지도자
링치차오(양계초) 캉유웨이의 제자로 변법자강운동을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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