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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오에와의 특별한 만찬[펌]

황석영, 오에와의 특별한 만찬
시니어 이야기 2009/05/19 05:16 http://blog.hani.co.kr/parkje09/22273

황석영 선생의 ‘잘못된 동행’이 빚은 소용돌이가 한창입니다. 문득 제 기억창고의 어느 한 구석에 갈무리되지 않은 채 방치됐던 에피소드 한 자락이 떠올랐습니다. 황석영, 오에 겐자부로 선생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저녁이었습니다.


2005년 7월14일. 지금도 그 날짜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나중에 얘기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한겨레>가 마련한 ‘문학과 동아시아를 말하다’는 제목의 대담에 응했습니다. 대담 정리와 사진이 당시 도쿄 특파원이었던 저의 몫이었고, 오에 선생과 가장 가까운 한국인인 윤상인 한양대 교수가 통역을 맡았습니다.


저는 문학이나 문화 쪽을 맡은 적이 없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는 데 전혀 주저할 이유가 없는 황석영 선생의 명성만 듣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일본의 국민작가인 오에 선생에게는 그 전부터 헌법 개정과 관련한 인터뷰를 꾸준히 요청해오던 터였습니다. 그런지라, 뒤치다꺼리를 하는 잡역이었음에도 제게는 더 없이 기대되는 자리였습니다.


일흔이던 오에 선생이 대담 내내 보인 자세는 진지와 성실, 그 자체였습니다. 사전에 제게 요청해 받은 주요 대담 항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미리 정리해 손으로 써 준비해 두었는가 하면,대담에 사용하는 한 단어, 한 문장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황석영 선생에 대한 그의 태도였습니다. 황석영 선생을 맞이할 때부터 우리가 집을 나설 때까지, 애정과 정성으로 버물린 오에 선생의 눈빛을 감지하기는 너무도 쉬웠습니다.

황석영.jpg


오에 선생에겐 대담 자체보다 황석영 선생과의 만남이 이날의 주요 이벤트였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대담은 자연스레 저녁 식사로 이어졌고, 오에 선생 부부는 우리가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맛난 음식을 내왔습니다. 평소 즐겨 듣는다는 가야금 병창을 배경 음악으로 깔았습니다. 돼지고기를 재료로 했던가(?) 하는 이날의 메인 프랑스 요리는 그가 직접 만든 것이었습니다. 고기를 부드럽게 하고 풍미를 더하기 위해 사흘이나 삶았다고, 그의 부인-이타미 주조의 누이-이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황석영 선생 덕에 초 귀빈 대접을 받은 저는 덩달아 풍선 탄 기분이었습니다.


노벨 문학상 얘기는 오에 선생이 꺼냈습니다. 일본의 두 번째 수상 작가와 한국에서 가장 유망한 작가의 만남이었으니 너무도 당연해 보였습니다. 칭찬에 그다지 헤프지 않은 오에 선생은 황석영 선생이 수상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는 얘기를 몇 차례나 되풀이했습니다. 한국 작가들이 국제무대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만큼, 자청해서 돕겠다는 얘기와 함께.특히 <손님> 영어판의 추천서를 쓴 그는 이 작품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구라’로 널리 알려진 황석영 선생도 모자람이 없이 추임새를 넣었고, 여덟 살 터울인 두 사람은 당장 의형제라도 맺을 태세였습니다. 밤은 그렇게 무르익었고, 우리는 시간의 빠른 흐름을 한탄하며 그 집을 나섰습니다.


두 사람이 쉽게 의기투합한 데는 이웃 나라의 탁월한 작가라는 공통점 이상의 것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작가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감대가 그것입니다. 자위대 궐기를 외치며 할복자살한 일본의 대표적 우익 작가 미시마 유키오와 오에 선생의 관계 단절도방증이 될 수 있습니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미시마는 일찌감치 오에 선생을 다음 수상자로 지목하며 애정을 쏟았지만, 오에 선생은 냉담했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황석영 선생의 삶을 굳이 되돌아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고, 그것을 작품과 자신의삶을 통해 관철시킨 작가는 드뭅니다. 북한 방문과 해외 체류, 수감 생활을 겪으면서도 대중성을 놓치지 않아, 여전히 잘 팔리는 작품을 내놓고 있습니다.


오에 선생 또한 고교 시절부터 작품을 토해내기 시작하고, 바람직스럽지 못한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에 맞지 않는 자민당 정부가 주는 훈장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평화헌법을 개악하려는일본 우익의 움직임이 거세진 지난 몇 년 동안은 '헌법 지키기'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오에 선생의 다소 밋밋하게 보이는 지난 세월에 비하면, 황석영 선생의 삶은 요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오에 선생은 도쿄대에서 프랑스와 미국 문학의 성취를 흡수하며 ‘온실의 화초’처럼 문학 엘리트의 길을 걸었습니다. 반면, 황석영 선생은 ‘잡초’처럼 한국 사회의 바닥을 훑은 경험과 그를 통해 단련한 문제의식으로 문제작을 끊임없이 내놓았습니다. 사회적 발언의 강도나 범위에서도 황석영 선생이 훨씬 앞섭니다. 이런 차이에는 너무 다이내믹한 한국과 너무 활력이 떨어지는 일본 사회의 특성도 반영돼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깊이라는 면에선 평가가 조금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황석영 선생이 최근 <한겨레> 인터뷰에서 언급한, 자신이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메시아 콤플렉스’와도 관련돼 있어 보입니다. 황석영 선생은 치열한 삶을 살아왔고, 그런 작품을 써온 만큼 누구보다 당당할 자격이 있습니다. 다만,당당함과소명의식이 너무 앞서다보면 다른 많은 것들이 자신의 시야 바깥으로 밀려나게 되고,겸손을 잃기 쉽겠지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얘기이지만.


저는 황석영 선생을 잘 알지 못하지만, 이번 파동이 변신이니, 전향이니 하는 거창한 해석이나 평가를 요구하는 사안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인간 행동의 확률적 분석’을 즐겨하는 제가 보기에, 그가 그런 식의 변신을 할 가능성은 확률적으로 매우 낮습니다. 변신을 통해 개인적으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노추’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있다고 느끼기 쉬운 늘그막에 한 자리를 한다든가 하는 눈에 보이는 뚜렷한 이익이 있을 때 성립되지요. 아님, 일제나 군사정권 시절처럼 구체적 탄압이 있든지.굳이 동기유발 요소라면, 노벨 문학상 수상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지원을 들 수 있겠지요. 절대 아닐 거라고 단정은 못하겠지만, 설득력이 커 보이지는 않는군요. 문학상에 정부의 로비가 그렇게 중요하게 작동할지 의문일뿐더러, 그에게 훨씬 호의적인 지난 정부에서도 딱히 성과물은 없었으니.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인 ‘착각’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자신의 소명 의식을 지나치게 앞세우는 바람에 합리적 판단 기능이 한동안 작동하지 않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 스스로는 각오가 됐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발언이나 행동이 가져올 후폭풍은 자신이 욕먹는 수준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깨닫기 어렵지요.

황석영 선생과의 첫 만남에서 받은 잠깐의 인상도 저의 이런 생각에 보탬이 됐습니다. 저는 대담 이튿날 그의 제안에 따라 정경모 선생-현재 <한겨레>에 ‘길을 찾아서’를 연재하는-을 찾아가기 위해 사무실을 나서다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오른쪽 발목 뼈가 부러지는 정도에서 그쳤지만, 이후 몇 달 동안 깁스-목발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한겨레>의 도쿄 특파원이 저 혼자였으니, 해방 60돌을 맞은 그 해 여름의 쏟아진 일거리를 피해나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4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러닝머신을 타거나 공을 찰 때면 어김없이 오른발잡이인 저의 오른발이 먼저 피로를 호소해, 씁쓸한 옛 기억을 상기시키곤 합니다. 근육의 기억력이 참 대단하지요.


그 때 저는 콘크리트 길바닥에 드러누워 지나가는 사람에게 구급대를 불러달라고 부탁한 뒤, 그에게 전화를 걸어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미안함을 전했습니다. 휴대폰에선 그의 건조한 대답이 들려왔습니다.제가 그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나 이후 대담 정리를 위해 메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괜찮냐’ 정도의 한마디는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밖에도 서로 못마땅하게 느낄 만한 일화가 있긴 하지만 소개할 성격은 아닙니다.


바로 전날오에 선생의 사람과 사물에 대한 너무 겸손한 모습을 봤기 때문에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와 같은 나이인 그의 맏아들 히카리는 뇌 장애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오에 선생은 거의 반세기 동안 그 아들을 뒷바라지하며,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찾아내 작곡가로 키웠습니다. 황석영 선생과 대화하는 도중 “집필보다 일상이 훨씬 힘들다”고 털어놓았습니다. 힘든 일상이끊임없이 자신을 겸허하게 만들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황석영 선생이 훨씬 밋밋한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이는 오에 선생에게서 그 부분을 배웠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두 사람은 한-일, 동아시아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나이 60, 70을 넘기고도 작품 활동은 물론이고, 사회적 책무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동안 '세상을 바꾸는 시니어'(세바시)들을 소개해왔는데, 이들은 그 첫 줄에 두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의 소개가 텔레비전 시리즈물이라면, 이번 글은 ‘극장판’ 정도로 봐주면 좋겠습니다.


황석영 선생은 이번 소동으로 자신의 삶과, 작가의 상상력이 주는 자유를 뛰어넘는 사회적 파장에 대한 고민을더 깊게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사욕을 위한 변신인지, 잠시의 혼란인지를 판별하는 데는 그리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60년이 넘는 그의 지난 삶과 작품,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은몇 마디 혼란스런 언동으로 지워질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21세기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역사의 역류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 모두의 자산을 소중하게 여길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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