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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Hummel

당대 베토벤에 필적했던 작곡가 Hummel

요한 네포무크 훔멜은 위대한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였다. 훔멜은 8세 때에 우연히 모차르트를 만났다.
모차르트는 훔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집에 데려가서 기숙하며 제자로 가르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렇게 하여 훔멜은 모차르트의 삶에 있어서 최초로 그의 집에 기숙하는 제자가 되어 피아노와 작곡법 등을 배웠다.
1년후 훔멜은 9세 때에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을 대중 앞에서 연주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훔멜은 2년동안 모차르트의 가족과 함께 생활했다.

훔멜은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인 프레스부르크(Pressburg)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셉 훔멜은 비엔나의 제국군악학교장이었으며 쉬카네더(Schikaneder)극장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다.
쉬카네더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초연에서 파파게노 역할을 맡았던 흥행자, 대본가, 성악가 겸 연극인이다.
어린 훔멜이 모차르트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모차르트의 친구인 쉬카네더 때문이었다.
훔멜이 모차르트의 집에서 2년을 보내며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성장하자 그의 아버지는 욕심을 냈다.
훔멜을 모차르트처럼 유럽의 여러곳을 데리며 다니며 연주회를 하면 돈을 벌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훔멜은 런던으로 갔다.
이곳에서 무치오 클레멘티(Mucio Clementi)의 주선으로 연주회도 하고 공부도 하며 4년을 지냈다. 하이든도 마침 훔멜과 같은 시기에 런던을 방문하고 있었다.
하이든은 훔멜을 위해 1791년 피아노 소나타 A플랫장조를 작곡했다. 훔멜은 하이든이 참석한 가운데 이 곡을 하노버 스퀘어 룸에서 초연하였다.
훔멜이 연주를 마치자 하이든이 앞으로 나와 훔멜을 칭찬하고 뭐 사먹으라고 1기니의 금화를 훔멜의 손에 쥐어주었다고 한다. 그해 12월에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났다.

훔멜은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와 스페인을 순회연주할 계획이었으나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사회가불안 속에 있었기 때문에 취소하였다.
훔멜은 비엔나로 돌아왔다. 비엔나로 돌아온 훔멜은 작곡에 대하여 더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 알브레헤츠버거, 하이든, 살리에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쯤하여 젊은 베토벤이 비엔나에 도착하였다. 베토벤도 역시 하이든과 알브레헤츠버거로부터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훔멜과 베토벤은 동문으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지내게 되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특별한 것이었다. 간혹 경쟁의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투다가 화해하기를 여러번이나 했다. 베토벤도 한 성격 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훔멜은 베토벤을 끝까지 존경하였다. 베토벤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훔멜은 부인 엘리자베트와 제자 페르디난트 힐러를 데리고 몇번이나 베토벤을 방문하였다.
베토벤은 훔멜에게 자기가 죽으면 자기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 달라고까지 부탁했다. 훔멜은 베토벤을 위한 추도연주회에서 즉흥곡을 연주했다.
훔멜이 슈베르트와 좋은 친구가 된 것도 이 연주회에서였다. 슈베르트는 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세편을 훔멜에게 헌정하였다.
그러나 이들 소나타가 출판될 즈음에는 훔멜과 슈베르트가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출판사는 이 곡들을 훔멜이 아닌 로베르트 슈만에게 헌정하는 것으로 변경하여 출판했다.
작곡가가 자기의 곡을 헌정할 때에는 관례적으로 살아 있는 인물에게 헌정했다. 당시 슈만은 생존해 있었다.

1804년 훔멜은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에서 음악감독으로 봉사하던 하이든의 자리를 이어 받았다. 훔멜은 7년동안 에스터하지 궁전의 음악감독으로 재직했다.
그러나 피아니스트인 훔멜로서는 에스터하지의 오케스트라 지휘가 적성이 아니었다. 결국 훔멜은 근무태만이라는 이유로 사직서를 써야 했다.
이후 훔멜은 러시아와 동유럽을 순회 연주하였고 이때에 오페라 성악가인 엘리자베트 뢰켈(Elisabeth Roeckel)을 만나 결혼하였다. 그후 훔멜은 슈투트가르트와 봐이마르의 음악감독을 지냈다.
봐이마르에 있을 때에는 괴테와 쉴러와 친분을 맺기도 했다. 훔멜은 봐이마르를 유럽 1류의 음악도시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훔멜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음악가들을 봐이마르로 초청하여 음악회를 열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단원 등 직원들의 퇴직후 생활을 위해 음악가 연금을 처음으로 실시했다.
음악가 연금이 부족할 것 같으면 음악회를 열어 재원을 충당하였다. 뿐만아니라 훔멜은 사상 처음으로 음악저작권을 위해 투쟁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훔멜은 근대 음악저작권의 선구자였다.



훔멜은 독일에 있을 때 A Complete Theoretical and Practical Course of Instruction on the Art of Playing the Piano-Forte(1828: 피아노연주의 이론과 실기 완전 정복)이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수천권이 팔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 책은 새로운 운지법과 장식음 연주법에 대하여도 자세히 지시해 놓았기 때문에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후에 훔멜의 피아노 연주 기법은 칼 체르니를 통하여 전수되었고 체르니의 기법은 리스트를 통하여 전파되었다.
체르니는 처음에 베토벤에게서 배웠으나 어느날 훔멜의 연주를 듣고 베토벤을 떠나 훔멜의 집으로 향했다.

훔멜의 영향력은 쇼팽이나 슈만의 초기작품에서도 볼수 있다. 특히 쇼팽의 협주곡에서는 훔멜의 피아노협주곡 B 단조와 피아노협주곡 A 단조를 상당히 반영하였음을 느낄수 있다.
쇼팽은 훔멜이 폴란드와 러시아 연주여행을 다닐 때에 그의 음악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슈만도 훔멜의 작품을 연주하기를 즐겨했다.
특히 소나타 F 샵 단조와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은 슈만의 레퍼토리에 자주 포함되는 것이었다. 나중에 슈만은 훔멜에게 배우겠다고 요청하였으나 훔멜은 슈만이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거절했다.
리스트도 처음 얼마 동안은 훔멜에게서 배웠다. 그러나 리스트의 아버지는 훔멜이 너무 많은 레슨비를 요청하기 때문에 포기하였다.
훔멜의 제자 중에는 칼 체르니, 프레데릭 질르허(Frederick Silcher), 페르디난트 힐러, 지기스몬트 탈버그, 펠릭스 멘델스존, 아돌프 폰 헨젤트(Adolf von Henselt) 등이 있다.

훔멜은 8편의 피아노협주곡, 10편의 피아노 소나타, 3편의 피아노 3중주곡, 1편의 피아노 4중주곡, 목관악기 8중주곡, 2편의 피아노 6중주곡, 만돌린 협주곡, 트럼펫 협주곡,
4손을 위한 피아노곡, 22편의 오페라 및 징슈필, 미사곡 등을 작곡했다. 훔멜의 철학은 ‘세상에 기쁨을 주어 세상을 엔조이하자’는 것이었다. 즉, 음악으로 세상을 기쁘게 살자는 것이다.
훔멜은 말년에 새로운 젊은 작곡가들이 탄생하고 새로운 젊은 연주의 대가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자기의 패션은 서서히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특히 리스트나 마이에르베르와 같은 신성의 등장은 훔멜이 지금까지 고수해온 클레멘티 스타일의 깔끔한 테크닉, 그리고 균형 잡힌 고전주의에 대한 말없는 저항이라고 생각했다.
훔멜은 아직도 갈채를 받을 때에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는 1837년 봐이마르에서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프리메이슨이었던 그는 봐이마르의 자기 집 뒤뜰에 프리메이슨 건물을 짓고 이를 프리메이슨에 기증하였다.

훔멜은 생전에 많은 존경을 받았고 세상을 떠날 때에도 애도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은 그를 망각하였다.
훔멜의 작품이 오늘날 제대로 연주되지 않는 것도 생각보다 빨리 진행된 망각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새로운 낭만주의의 시대가 파도처럼 밀려 왔기 때문이었다.
이제 훔멜의 고전적 아이디어는 빛바랜 것이 되었다. 훗날 20세기 초에 고전의 리바이벌이 있을 때에도 오히려 하이든은 빛을 보았지만 훔멜은 잊혀져 있었다. 왜 그랬을까?
모차르트라는 거목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처 http://blog.daum.net/johnkchung/6823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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