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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케이블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1848~1903)은 빈센트 반 고흐, 폴 세잔과 함께 20세기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로 꼽힌다. 소설 [달과 6펜스]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고갱은 강렬한 색채의 실험으로 ‘종합주의’를 선도하였고, 그의 작품들은 이후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페루와 프랑스에서 보낸 유년기

고갱은 저널리스트 클로비스 고갱(Clovis Gauguin)과 페루계 사회주의자(플로라 트리스탄)의 딸인 알린느 마리아 샤잘(Aline Maria Chazal)의 사이에서 태어났다(프랑스 파리). 1851년에 당시 파리의 정치적 혼란을 피해 페루로 가던 중 고갱의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고갱과 여동생, 그리고 어머니는 페루의 리마에서 외삼촌과 함께 4년을 살았다. 이곳에서의 이미지들은 훗날 고갱의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1854년 무렵 고갱과 그의 가족은 프랑스로 돌아와, 할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 오를레앙에 정착했고, 고갱은 이곳에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1865년 17살이 되었을 때 고갱은 선박의 항로를 담당하는 수습 도선사(사관후보생)가 되어, 약 6년간 상선(商船)을 타고 라틴아메리카와 북극 등 많은 곳을 여행하였다. 1871년 고갱은 인도에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파리로 돌아와,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어머니의 친구가 마련해 준 증권 거래소의 점원 일을 하게 된다. 고갱은 1873년에 덴마크 출신의 메테 소피 가트(Mette Sophie Gad)와 결혼하여 10여 년 동안 5명의 아이를 낳았다.


작품 수집가로 시작한 초기 활동

고갱은 결혼 이후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졌고, 이 무렵부터 그림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여 특히 인상파 작품들을 많이 수집했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후견인이었던 어머니의 친구 구스타브 아로사의 영향으로 작품 수집까지 하게 됐다. 그는 갤러리를 빈번히 다니면서 당시 떠오르는 작가들의 작품을 사들였다. 이 즈음의 고갱은 작품을 구입하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그리기도 하였으며, 27세 무렵에는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 연구소에 다니면서 그림을 배웠다. 1876년에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카미유 피사로를 알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의 제5회 인상파전 이후로는 주요 멤버가 되었다.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의 붕괴로 고갱의 직업은 불안해졌다. 이때 고갱은 화가가 되기 위해 피사로와 의논하게 되고, 피사로의 소개로 폴 세잔, 아르망 기요맹 등과 친교를 맺으면서 확실하게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35세가 되던 1883년부터는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였고, 생활비가 저렴한 루앙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고 그의 처가가 있는 덴마크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파리로 혼자 돌아온 이후로는 한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파리 생활은 여전히 가난의 연속이었고 고갱은 벽보 붙이는 일을 하며 연명해갔다. 1886년의 제8회 마지막 인상파전에 고갱은 무려 열아홉 점의 작품을 출품했지만, 불행하게도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등 신인상주의 화가들의 빛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도시생활에 지친 그는 1886년 6월, 브르타뉴(Bretagne)의 퐁타방(Pont-Aven)으로 이사하여 그림에 전념하였다. 퐁타방의 주민들은 프랑스 전통 의상을 즐겨 입었으며 화가의 모델이 되는 것을 좋아하여, 많은 외국인 화가들이 퐁타방을 즐겨 찾았다. 이곳에서 고갱은 종래 인상파풍의 외광묘사를 버리고 차차 특유의 장식적이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토속적인 토기류제작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나중에 폴 세뤼지에, 모리스 드니, 피에르 보나르 등의 나비파(Nabis)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토기에서 비롯된 그의 원시적인 관심은 1887년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 섬으로 향하게 한다.


빈센트 반 고흐와의 만남

고갱은 퐁타방에서 알게 된 샤를 라발(Charles Laval)과 함께 파나마를 거쳐 마르티니크 섬에 갔다가, 이듬해 파리로 돌아왔다. 짧은 여행 기간 동안 흑인들의 집에 거주하고 그들의 일상을 지켜본 고갱은 즐겁게 지냈지만, 그곳의 여름은 너무나 더웠고 거주지는 비에 젖어 기울어졌으며 설사병과 열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때 제작된 약 10여 점의 원시주의적 미술 작품들은 파리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특히 화상(畵商)인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 테오는 고갱의 작품에 큰 감동을 하여 고갱과의 거래를 시작했다. 테오와의 만남을 통해 작품에 대한 자신감이라는 수확을 얻은 고갱은 더 이상 자연을 미화하며 재현하는 따위의 그림은 그리지 않고, 사물을 자기 방식대로 단순화시키며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고갱은 파리에서 지내며 고흐와 툴루즈 로트렉 등을 알게 되었고, 특히 고흐와의 우정은 특별했다. 테오의 주선으로 고흐가 머물고 있는 아를(Arles)의 ‘노란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그림을 그렸다. 당시 고흐는 브르타뉴에서 화가들이 모여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매우 부러워하고 있었고, 화가들은 함께 모여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여 남프랑스의 아를에 노란 집을 만들어 화가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테오로부터 생활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을 약속받아 아를로 행한 고갱은 고흐와의 그림에 대한 견해 차이로 갈등과 대립을 겪었고, 급기야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둘은 헤어졌다.

고갱은 다시 브르타뉴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고, 조각, 판화, 도기 제작에도 전념하였다. 고갱은 에밀 베르나르, 샤를 라발(Charles Laval) 등 다른 작가들과 함께 퐁타방을 더욱 빈번히 왕래하였고, 이때 퐁타방파라고 불리는 강한 순색의 사용과 그림에 주제를 선택하는 상징주의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파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퐁타방 또한 매우 번잡하게 느껴 더욱 한적한 바닷가의 작은 마을인 르풀뤼로 이주하였다.

[황색의 그리스도]는 고갱이 한 성당에서 본 나무 십자가의 예수상을 스케치하여 그린 것이다. 노란색의 예수 모습과 배경, 단풍이 든 것처럼 붉게 채색된 나무 등 전체적으로 매우 단순화된 작품이다. 십자가 주변에는 묵상하는 세 여인이 그려져 있으며, 이들은 성모 마리아와 예수를 따랐던 여인들이다. 이 그림 속에서 푸른 빛의 색을 제외하곤 원근감의 표현은 아예 없다. 단지 배경을 구분 짓기 위한 윤곽선이 있을 뿐이다. 평면, 강렬한 색채, 대담한 윤곽선으로 구성된 황색 그리스도는 고갱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인상주의와의 결별

고갱은 점차 파리 아방가르드 화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1889년에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의 미술전시에서는 공식행사인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 전시에 고갱의 참가를 거부했다. 이에 고갱은 전시장 건물 앞 볼피니 카페를 빌려 ‘인상주의와 종합주의’ 그룹전을 열었다. 이는 박람회에 참여하지 못한 불만을 시위하는 장이었다. 피에르 보나르, 에두아르 뷔야르, 그리고 조각가 아리스티드 마이욜까지 참여한 이 전시회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림의 내용 자체가 인상주의와는 거의 무관한 그림들이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와 종합주의’는 고갱이 인상주의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붙인 전시 제목으로 인상주의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장이기도 했다.

종합주의’란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외형적 현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과 자신의 경험을 종합하여 가시적인 세계가 아닌 감추어진 세계를 회화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즉 강렬한 색과 굵은 선, 단순화된 형태를 주관적이면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려는 경향으로 고갱의 사상이 이 속에 함축되어 있다. 종합주의 화가들은 일반적으로 나비파 화가로 소개되며, 시인 앙리 카잘리스가 붙인 ’나비파’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의 나비 즉 ’예언자’를 뜻하는 것이다. 고갱은 색의 음영과 농담의 원근법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색채만을 사용할 것을 권했다. 이러한 고갱의 이론은 인상주의가 한계를 드러내며 해체되자 젊은 화가들을 매료시켰지만, 일반인들의 관심은 끌지 못했다.


타히티의 이국적인 매력에 흠뻑 빠진 고갱

고갱은 박람회에 출품된 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이국적인 풍물에 열광하였고, 열대지방의 원시적인 삶을 동경하였다. 각국 민속관들 중에서 자바의 민속관은 고갱으로 하여금 이국적인 매력에 흠뻑 빠지게 했다.

고갱은 파리에서의 힘든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그는 에밀 베르나르에게 “올해는 그토록 힘겹게 싸웠건만 파리의 조롱 말고는 소득이 없네. 여기서도 그들의 조롱이 내 귀에 들리고 있네. 너무 절망스러워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을 정도라네.”라며 자신의 심경을 피력했다.


고갱은 산업문명으로 썩은 서양을 하루빨리 떠나고 싶다고 했다. 이를 위해 작품을 공매 처분하려고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일반인들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갱은 코펜하겐에 있는 가족을 찾아가 잠시 만난 뒤, 꿈에 그리던 남태평양 타히티파페에테 섬으로 간다. 무려 두 달을 걸려 찾아간 파페에테 섬은 이미 문명의 때가 묻어 있어 그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후 고갱은 문명의 흔적이 거의 없는 섬을 찾다가 마침내 그가 원하던 곳인 마타이에아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열세 살의 원주민 테하마나(테후라)라는 소녀와 동거한다. 고갱의 작품에 많이 등장한 테하마나는 고갱이 찾던 순수하고 아름다운 폴리네시아인이었다. 그는 테하마나와 같이 지낸 기간 동안 왕성한 작품 활동에 빠져들었고 행복했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송금이 오래전에 끊겨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다. 그의 작품이 한 점도 팔리지 않은 것이다. 물감 값이 떨어지자 그림은 엷어졌고, 그는 이런 현실을 두고 “고통이 천재성을 고무하기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통이 너무 심할 때에는 천재성이 완전히 바닥이 나고 말 것이다.”라며 자조하였다.

고갱은 파리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했고 그림 그리는 일도 접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작품을 호평했던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Albert Aurier)와 고갱의 작품을 거래하던 유일한 화상인 테오도르 반 고흐의 죽음으로 고갱이 기댈 곳은 없어진 셈이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시련의 시기 동안 엄청난 창작욕에 불탄 고갱은 무려 80점이나 되는 작품을 그렸다.

대작의 탄생과 불행했던 말년

1893년 고갱은 테하마나를 남겨둔 채 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뒤랑뤼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타히티의 삶과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삽화를 곁들인 수필을 쓰기도 했다([노아 노아]). 그러나 전시회는 상업적으로 완전히 실패했고, 만신창이가 된 고갱은 다시 타히티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1895년, 파리의 리옹 역. 고갱은 짐에 걸터앉아 울었다. 절망의 늪에 빠져 인생의 낙오자가 된 듯한 자신을 뒤돌아 보며 그는 울고 있었다. 타히티가 지상의 낙원이라고 큰소리쳤지만 그와 동행하려는 동료화가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 고갱은 아내로부터 돈을 빌려, 다시 타히티의 푸나아우이아로 가서 타히티 전통가옥을 짓고 살았다.

그의 육체는 점점 병들어갔다. 거듭된 음주로 저항력이 떨어져 매독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피부에 난 뾰루지로 인해 나병 환자로 오해받기도 했다. 이 시기에 고갱은 입원과 퇴원을 수없이 반복했다. 14세의 원주민과 동거를 하였지만, 가난과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갱은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자살하기 전에 유언과도 같은 유작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하여 그린 대작이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이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친구 몽프레(Daniel de Monfreid)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12월 한 달 동안 유작으로 대작을 그려보기로 했네. 미친 듯이 그렸네. 사람들은 이 작품이 미완성이라고 하겠지. 그러나 이 작품은 내가 지금껏 그린 것 중에서 최고이며, 앞으로도 이 그림과 비교할 만한 작품을 그릴 자신이 없네. 작품 구상이 워낙 뚜렷해 어느덧 생동감이 느껴지고 있네. 그림 상단의 양쪽 귀퉁이는 연노랑으로 칠하고, 위의 양 귀퉁이가 손상된 프레스코 벽화처럼 말이야. 나는 이것을 걸작으로 본다네.”

이 작품은 삼베에다 그려서 매우 거친 질감으로 느껴진다. 마치 파노라마 사진을 보는 듯 넓게 펼쳐진 풍경에는 여러 사람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다. 모든 것을 체념한 고갱은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고, 그의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붓을 들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작품을 그의 추종자 모리스 드니에게 보냈지만, 여덟 점의 작품을 판 돈으로 불과 1,000프랑 밖에 받지 못했다.

남은 삶을 보낸 타히티 섬에서 그린 그의 작품들은 다분히 종교적인 상징주의와 폴리네시아의 이국적인 시각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감각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사물을 평면적으로 표현하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려 했다. 무엇보다 감정을 주관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점은 이후 20세기 미술의 수많은 화가들-앙리 마티스, 피카소, 뭉크, 알베르 마르케, 블라맹크, 앙드레 드랭, 라울 뒤피-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 모두 고갱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갱은 1903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당시 고갱을 후원하고 있었던 화상 아브루아즈 볼라르는 사망 몇 달 후 추모전을 열었고, 이어 3년 뒤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하여 고갱의 명성을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오디오 케이블은 오디오 콤포넌트들을 서로 연결하는 전선을 말한다. 케이블도 오디오 콤포넌트 그 자체로 볼 수 있는데, 그 품질을 논하기 이전에 기본적으로 케이블이 없으면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스피커와 마찬가지로 자체 전원이 없는 패시브(passive) 소자이며 선의 재질과 마감, 구성방식에 따라 매우 다양한 제품들이 존재한다. 용도에 따라 크게 나누면, 스피커 케이블, 아날로그 인터커넥터 케이블, 디지털 인터커넥터 케이블, 파워케이블로 나눌 수 있겠다.


스피커 케이블

스피커 케이블은 파워앰프와 스피커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파워앰프로부터의 확장된 전류를 전송하기 때문에 대용량 전송에 유리하게 제작되어 있다.스피커 케이블은 과거에는 가정에서 사용하는 단순한 전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현재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그렇게 된 계기는 80년대 후반 고성능 북쉘프 스피커들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대역과 다이내믹 레인지를 넓혀가던 소형 스피커들은 저능률, 저임피던스에 대응하는 전류전송이 가능한 케이블들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선재의 종류와 순도, 심선의 구성과 피복 등의 부문에 걸쳐 발전을 거듭해 왔다. 선재의 재질, 순도와 단면적, 결속 방식, 절연과 실드(Shield, 전자기차폐), 단자 처리 등에 따라 다양한 제품이 있다.

스피커 케이블의 선재의 재질은 동선(copper)이 가장 널리 사용되는데, 열도 그렇지만 전기 전도율이 매우 좋은 재질이기 때문이다. 동선은 구리를 원료로 만든 것인데 일반적인 구리에는 다소간의 산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산소는 전류흐름에는 방해가 되는 성분이라서 산소를 효과적으로 제거해서 전기 전송의 품질을 높이게 된다. 이런 동선을 ‘무산소동선(OFC)’이라고 하여 스피커 케이블 및 다른 신호전송용 케이블에 많이 사용된다. 케이블의 제조에는 이 같은 무산소동선을 은으로 도금한 것, 아예 은으로 만든 것, 은 도금선과 동선을 섞은 것, 주석을 사용한 것 등 다양한 선재들이 사용된다.

스피커 케이블은 앰프와 스피커를 연결한다. 연결할 때는 스피커 케이블의 피복을 벗기고 내부의 전선을 꼬아서(연결이 편리하도록) 직접 연결시켜도 된다. 이 방법을 직결(直結)이라 하는데 불편하기도 하고 접점을 고루 유지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어서 보통은 단자를 사용한다. 이때 사용하는 단자의 모양에 따라 말굽 단자와 바나나 단자로 나눈다.

스피커의 단자는 앰프쪽과 스피커쪽 양쪽의 단자 모양을 감안해 결정해야 한다. 보통 앰프 쪽은 말굽형과 바나나형을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으나 제품에 따라서 사이즈가 조금씩 다를 수 있고, 사용하는 단자에 제한이 있을 수 있으니 확인이 필요하다. 잘못하면 애써 마감한 단자를 잘라내야 하는 일이 종종 있다. 처음부터 스피커 케이블에 단자가 처리되어 있는 완제품 형태도 있는데 이런 제품의 구입시에는 좀더 세심한 사전 확인이 필요하다.


아날로그 인터커넥터 케이블

인터커넥터는 프리앰프와 파워앰프, 소스기기와 프리앰프 사이를 연결하는 케이블이다. 스피커에 앰프가 내장된 형태(액티브 스피커, active speaker)라면 스피커와 다른 기기를 연결할 때도 사용한다. 인터커넥터는 크게 아날로그 전송과 디지털 전송의 두 가지 용도로 나눌 수 있다. 아날로그용 인터커넥터는 좌우 한 쌍으로 구성되며, 종류는 다음과 같다.

언밸런스(unbalanced)

현재 가장 일반적인 방식의 접속케이블이다. 원래는 전화교환원처럼 수시로 뺐다 끼웠다를 반복하는 사용자를 위해 편리하게 만든 접속방식으로서, 가정용으로는 가전사로 유명한 RCA사에서 개발한 RCA단자를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만이 신호선으로 되어있고 주위를 도체로 둘러싸서 외부의 전자파를 차단한다. 이를 실드(Shield)처리라고 하며, 실드 부분이 ‘–’ 신호와 어스를 겸하게 된다. 외관상 ‘+’ 신호 하나만으로 된 구조라고 해서 언밸런스라고 부른다. 길이가 길어지면 노이즈와 험 등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보통 1~1.5m 단위로 제작된다. 왼쪽(L)이 흰색, 오른쪽(R)이 빨간색으로 흔히 표시되어 있으므로 같은 색끼리 연결하면 된다.

밸런스(balanced)

원래는 스튜디오나 공연장 등의 프로용 영역에서 사용되는 방식으로서 ‘+’와 ‘–’ 신호가 나란히 배치되어 밸런스라 한다. 제작자 캐논(Cannon)이 고안한 ‘XLR’단자를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 신호에 – (역상)신호를 추가시켜서 전송하고 최종 출력시에는 다시 역상신호를 빼주는 연산을 처리해서 전송시 유입된 노이즈 신호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론상으로는 노이즈 없이 장거리를 전송할 수 있다. 대신 입/출력시의 더하고 빼는 정교한 신호처리를 요한다. 언밸런스 방식보다 게인(소리가 증폭되는 정도)이 약간 높은 경우가 많아서 음질적으로 우세하다고 믿는 사용자들도 있다.

디지털 인터커넥터 케이블

디지털 인터커넥터는 디지털 신호를 전송하는 케이블로서 점차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주로 DVD 플레이어와 AV앰프, PC 및 CDP와 DAC를 연결할 때 등에 사용된다. 그 종류는 크게 동축케이블과 광케이블로 나뉜다. 기기에 따라서 지원하는 종류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잘 확인하고 구입하여야 한다. 디지털용 인터커넥터는 하나의 케이블로 좌우 채널이 다 연결된다. 종류는 아래와 같다.

동축케이블(Coaxial)

75Ω 동축케이블을 사용하는 디지털 전송 방식. 홈오디오에서는 외관상으로나 구조적으로 언밸런스 케이블과 동일한 RCA단자처리가 일반적이지만, 방송용으로 사용하는 BNC단자가 더 편리하기도 하다. RCA 단자를 사용하는 경우 아날로그 인터커넥터와 모양이 같으므로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아날로그 케이블의 경우는 좌우 한 쌍으로 각각 빨간색과 흰색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디지털 동축케이블은 좌우를 하나의 선재에 통합시킨방식이며, 단자는 보통 검은색이다. 주로 고주파 전송용으로 사용되는 케이블이므로 아날로그 케이블과 혼용되어서는 안 된다.

광케이블(TOS link)

부호 처리한 시그널을 광섬유를 통해 전송하는 전송방식의 하나이다. 광섬유는 유리나 플라스틱을 사용해서, 금속선재에 비해 가볍고 가늘게 제작할 수 있고 신호손실도 적다는 장점이 있다. 최근에는 오디오용의 품질보다는 빠른 전송속도를 이용해서 인터넷 등의 광역통신망에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다. 단자의 종류에는 네모난 모양과 동그란 모양이 있는데, 상호간 접속이 가능한 어댑터를 쉽게 구할 수 있으니 크게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파워 케이블

기기를 전원에 연결시키는 케이블이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기기는 220V용이 쓰이지만, 일본이나 미국에서 쓰던 제품은 100~117V를 사용하므로 전원케이블의 모양도 다르다. 오래된 주택에서는 110V 전원이 아직도 있어서 그것과 연결하여 사용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감압 트랜스와 연결하여 사용하여야 한다.

근래에 지어진 주택은 전원에 접지 공사가 잘 되어 있고, 콘센트나 멀티탭에도 접지 단자가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파워케이블도 대부분 접지 단자가 붙어 있다. 이런 이유로 2중 접지라는 문제가 발생하여 오디오에서 큰 잡음(그라운드 루프 현상, Ground loop)이 생기기도 한다. 이를 피하는 방법은 접지 단자가 없는 멀티탭을 이용하여 모든 기기의 전원을 거기에 연결하고 딱 1개의 기기만 접지 단자가 있는 콘센트에 연결하는 것이다.


케이블이 음질에 미치는 영향은?

케이블이 음질에 영향을 미치는지의 여부는 단편적으로 논하기 어렵다. 선재 특성에 따라 범위를 좁힌 후에, 직접 시청을 해보는 방법만이 가장 정확할 따름이다. 따라서 초심자인 경우 그 편차를 아예 무시하는 것이 속 편한 선택이 될 수도 있지만, 몇 가지 원리만 알면 적은 비용으로 다소간 음질을 보정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선은 가능한 짧게

선재의 길이는 길어서 좋을 것이 없다. 선재의 길이가 길면 저항이 커지고 잡음이 들어올 가능성이 커진다. 하지만 지나치게 짧게 재단을 하면 기기 배치가 난감해질 수도 있으니까 너무 길이에 집착할 필요는 없고 사용에 불편하지 않은 범위에서 가능하면 짧은 제품을 쓰는 것이 좋다.


케이블의 접점 관리

케이블의 양쪽 끝은 효과적인 단자 처리와 더불어 청결하게 유지시킬수록 성능을 극대화할 수 있다. 결국 케이블의 역할은 금속의 한 지점에서 다른 끝 지점간의 연결이며 케이블의 단자가 상대 접촉면과 최적으로 접촉하도록 관리하여야 한다. 즉, 녹슬거나 더러워지면 닦아야 한다는 뜻이다. 편리하게는 약국에서 파는 알코올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스프레이 방식의 ‘접점부활제’같은 전문용품을 사용하면 더 좋다.

케이블의 배치

케이블은 주변의 전류와 자기장에 영향을 받는다.대전류가 흐르는다른 케이블이나 앰프의 전원부 등의 강력한 전류원과 가까이 있을수록 신호전송에 이상이 생긴다. 케이블을 감싸는 쉴드의 소재가 열악할수록 이런 외부 유해환경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 따라서 케이블을 잘 정리해서 뒤엉키지 않도록 할 것이며, 인터케이블과 파워케이블, 스피커케이블은 서로 떨어뜨려 두는 것이 좋다. 불가피하게 케이블끼리 교차할 때는 가능한 직각으로 교차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오디오를 좋아하고 오랜 동안 들어온 사람들도 케이블에 대해서는 의견이다르다. 크게 3가지 입장으로 정리된다. 첫째는 케이블은 음질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런 사람들은 케이블에는 최소한의 비용만 투자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두 번째는 케이블은 음질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나 음색에는 영향을 준다는 입장이다. 이런 사람들은 본인의 취향에 따라 기기들을 꾸민후 약간 부족한 부분을 케이블로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케이블은 음색뿐 아니라 음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요소 중 하나라고 믿는 입장이다. 이런 사람들은 케이블에도 상당한 비용을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


케이블에도 적절한 관심과 관리가 필요하다

시간이 갈수록 케이블이 오디오시스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커지고 있다. 종종 오디오 액세서리의 범주로 분류되지만 오디오와 똑같은 기준으로 선별해야 하는 주요 장비 중 하나가 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케이블을 선택하느냐는 본인의 오디오 환경에 따라야 한다. 똑같은 케이블도 사용자의 시스템에 따라 다른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비싼 케이블을 연결해 놓고 좋은 소리를 기대하는 일도 무모하지만, 아무 케이블로나 무심하게 연결해 놓고 있었다면 약간의 관심과 노력으로 좀더 즐거운 음악 감상 시간을 만들 수 있다.

오승영 / 오디오 평론가, 전 <스테레오뮤직> 편집장
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폴리그램, EMI, 소니뮤직, 유니버설 뮤직에서 마케팅 매니저로 일했으며, <스테레오뮤직> 발행인 겸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 연구소 객원연구원 및 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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