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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1] 펌

영어 입문 반 년 만에 좔좔10대 때 과거 보던 선비 [조인스]

2010.03.19 15:16 입력 / 2010.03.19 15:19 수정

[강준식의 정치비사] 대통령 스토리 이승만 ①

고종 밀서 품고 미국 루스벨트 만나…대통령 된 뒤 영어 능통자를 관료로
돈암장 살 때 서정주 앞에서 부인 프란체스카에게 "나가!"호통
첫 부인 박승선, 이승만 투옥되자 덕수궁 앞 거적 깔고 읍소



해방, 6·25, 4·19, 5·16, 10·26…. 파노라마 같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가운데에는 늘 대통령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나뉜 절대적 지지와 극렬한 반대의 목소리가 부딪치는 가운데 한국의 대통령들은 고심의 나날을 보냈다. 그 고뇌의 뒤안길에 감춰진 대통령들의 인간적 면모는 어떠했을까? 초대 이승만부터 역대 대통령의 감춰진 삶을 들여다본다.

이승만과 영어
감옥에서도 영어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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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미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통역을 데리고 다니지 않아도 좋을 만큼 영어를 잘했던 대통령으로는 아무래도 미국에서 40년 가까이 생활했던 이승만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말고도 영국에 유학했던 대통령으로 윤보선이 있고, 미국에 유학했던 총리로 장면이 있다. 그러나 해방 직후 영어회화를 가장 유창하게 구사했던 정치인으로 G-2문서가 기록하고 있는 것은 장택상인데, 이는 유학을 갔던 나이와 관계 있는 듯하다.

장택상이 영국으로 유학간 나이는 17세다. 그에 비해 장면은 21세, 윤보선은 24세, 이승만은 30세 때였다. 이승만은 어릴 때는 도동(桃洞)서당에 다니며 <동몽선습> <통감> 그리고 4서3경을 공부했고, 13~19세에는 해마다 과거를 보았다.

그러나 정답을 돈 주고 판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던 개화기의 과거시험은 그를 번번이 낙방하게 만들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시험을 폐지한 조정이 신식학교를 세우고 젊은이들로 하여금 외국어와 서양문물을 배우도록 장려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들어가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화학을 가르치던 W. A. 노블 선생으로부터 알파벳을 배웠다는데 얼마나 머리가 좋았던지 “영어공부를 시작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영어선생이 되었다고 하여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이정식 역, <청년 이승만자서전>, <신동아>, 1979년 9월호).
이승만은 어떤 인물인가?
서울 종로구 이화동 1번지 낙산 기슭에 위치한 이화장(梨花莊) 대문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동상이다. 오른손을 치켜든 동상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외치는 것만 같다. 혼돈의 해방정국에 그가 던졌던 이 구호는 지금도 세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다.

정치적 리더십의 지향점은 결국 통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세력으로부터 분열주의자로 매도당하기도 했던 그는 특히 4·19혁명 뒤 독재자라는 낙인까지 찍혀 역대 대통령의 인기 순위에서 늘 상위권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최근 긍정적 시각이 대두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주로 ‘우리는 지금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에 들 정도로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이 같은 경제발전은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체제의 틀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경우처럼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받들어 서울 광화문광장에 동상도 세우고, 거리에 이름도 붙이고, 화폐에 초상화도 집어넣자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중학교 때 4·19를 겪은 나로서는 아쉬운 대목들이 있다. 우선 어린 학생에게까지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한 것은 다름 아닌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그래서 1950년대의 어린 나도 해마다 반장선거와 어린이회장선거에 나섰던 기억이 난다. 당시 초등학생에게 장래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대통령’이라고 대답하고는 했다.

분위기도 상당히 자유롭고 민주적이었다. 다시 말해 이승만의 정책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편 정책의 성공으로 자신의 부정적 통치가 부정되는 역사에서 토크빌효과(Tocquevillean effect)를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이승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승만 하면 친미주의라는 용어가 떠오른다.

비판세력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를 ‘미국의 앞잡이’로 매도하기도 했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대부분은 그가 미국의 덕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공부했고, 미국을 좋아했으며, 미국의 힘에 의존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묘한 것은 미국정부가 그를 시원하게 밀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시기마다 다르지만, 그는 미국정부로부터 줄곧 ‘왕따’당했다. 그럼에도 그가 미국의 덕으로 나라도 세우고 집권도 하고 전쟁도 치르고 경제원조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약소국의 희생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살벌한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미국을 아는 그가 미국을 철저히 이용한 결과였다.

그의 일생은 미국과 힘겨루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줄다리기를 하면서 끝내 미국을 자기 페이스로 끌어들였던 용미주의(用美主義)자-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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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께 한성 감옥에 수감된 이승만(왼쪽에서 세 번째)을 아들 봉수(앞줄 아이)가 면회 왔다.

배재학당에 2년 반쯤 다니고 1897년 졸업할 때는 영어 실력이 정부 고관, 외국 외교관, 선교사, 학부형 등 800여 명의 하객 앞에서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을 정도였다.

그 후 구국운동을 하다 붙잡힌 이승만은 서소문 옆 한성감옥, 속칭 ‘선혜청(宣惠廳)감옥’에 갇혀 사형수의 형틀을 쓰고 있으면서도 영어 단어를 외워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이 그런 공부를 해서 무엇에 쓰나’ 하고 옆에서 물으면 ‘죽으면 못 쓰더라도 산 동안 할 것은 해보아야지. 혹 쓰일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하고 태연히 대답했다”고 한다(프란체스카 도너 리, <대통령의 건강>, 1988)

같이 수감되었던 신흥우(申興雨)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은 감옥에서 <영일사전>을 갖고 있었고, 선교사들이 들여보낸 미국 잡지들( )과 신약성경을 교과서로 삼아 거기에 실린 영어 단어와 문장을 관사 하나 안 틀리게 다 외웠다고 한다. 나중에는 의욕을 갖고 영한사전을 F항목까지 집필하기도 했다.

1904년 8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후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건넨 고종의 밀서를 품고 미국으로 건너간 것도 영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통역 없이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도와달라는 청원을 영어로 말할 수 있었다.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더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조지워싱턴대 3학년에 편입한다.

배재학당(PaiChai Academy)에 다닌 기간을 단과대학 2년 수료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학비와 생활비는 민영환이 밀사 활동자금으로 보내준 300달러와 그 자신이 워싱턴 일원의 여러 장로교회의 주일학교나 청년회 모임, 선교사 모임에 다니며 영어로 신앙 간증을 하고 받은 사례비로 충당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하버드대학원을 거쳐 1910년 6월에는 프린스턴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에 가기 전 그가 고베(神戶)에서 탄 기선 시베리아호의 승선부에 적은 이름은 ‘Seung Manh Ye’, 학위를 받기 전 피츠버그 기독교대회의 참가자 명단에 적은 이름은 ‘E. Sung Man’이었던 데 반해 논문의 영어 표기명은 ‘Syngman Rhee’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Woman should be seen, not be he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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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5월 27일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이기붕 당시 민의원 의장(이 대통령 오른쪽) 가족과 함께했다. 맨 왼쪽이 이 의장의 장남이자 이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이다.
해방 후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그의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도구(tool)의 하나였던 영어를 중시하여 영어 잘하는 사람을 우대했다. 그래서 해방 전 미국유학을 다녀온 김도연(재무)·김태선(내무)·김현철(재무)·백낙준(문교)·윤치영(내무)·이교선(상공)·이기붕(국방)·임병직(외무)·임영신(상공)·장석윤(내무)·조병옥(내무)·조정환(외무)·최규남(문교)·최순주(재무)·허정(사회) 등을 장관에 발탁했고, 영국유학을 다녀온 신성모(국방·내무)·윤보선(상공)·장택상(외무) 등을 장관에 기용했다.

이 밖에 영·미에 유학했던 것은 아니지만 영어에 능통했던 변영태를 외무장관에 발탁하기도 했다. 이승만 시대의 육군참모총장 8명 가운데 군사영어학교 출신은 모두 5명이나 되었다.

미국생활을 오래 한 탓이기도 하고, 부인 프란체스카가 한국말을 잘 모르는 탓도 있어 이승만은 집에서 주로 영어를 사용했는데, 그 단적인 증거가 4·19 이후 하와이로 망명하면서 남기고 간 애견 ‘해피’의 존재다.

‘잉글리시 토이 스파니엘’ 계통의 이 개는 영어만 알아듣는 바람에 주인이 없던 이화장 측에서 기르기가 매우 곤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줄리아드음대를 나와 프란체스카와 가까이 지냈던 소프라노 편정희(片貞姬)가 두어 달 키우다 인편을 통해 하와이로 보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승만의 영어는 네이티브 스피커에게 완벽하게 들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시카고선>지의 마크 게인 특파원은 1946년 서울을 방문한 뒤 “이승만은 하버드에서 석사를 받고 프린스턴에서 박사를 받았지만 그의 영어는 부자연스러웠고 힘들여 문장을 이어나가고는 했다”고 꼬집기도 했다(Mark Gayn, , William Sloane Associates, Inc. New York, 1948).

스코틀랜드에 유학해 영어가 능통했던 오스트리아 출신 부인 프란체스카가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남편은 늘 학생처럼 열심히 새 (영어)단어를 외우며 꾸준히 공부했다. 나이 80이 넘을 때까지도 남편은 계속 공부를 하며…”라고 회고한 것을 보면 영어는 그에게 역시 외국어였던 모양이다.

실제로 이승만이 어떤 영어회화를 구사했는지 모르겠으나 프란체스카가 적어놓은 이승만의 영어 문장이 하나 있어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Woman should be seen, not be heard.”

회고록에는 이 문장이 “여자란 말이 적어야 한다”로 번역돼 있다. 그러나 의역해보자면 “여자는 얼굴을 보여야지, 말소리가 들려서는 안 된다→여자는 엉덩이가 가벼워야지 말이 많으면 못 쓴다”는 뜻 정도로 보통 한국인이 사용하기 쉽지 않은 미국식 영어였음을 알 수 있다. 프란체스카는 이 문장 앞에 “사실은 그동안 많은 분이 나에게 글을 써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나는 늘 사양해왔다.

그것은 ‘여자란 말이 적어야 한다(Woman should be seen, not be heard)’는 남편의 가르침에 따라 내가 살아온 때문이다”라는 설명을 붙여놓았다(<대통령의 건강>).
프란체스카의 순종적 성격과 이승만의 권위주의적 성격이 동시에 느껴지는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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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이 신문을 읽고 있다.

이승만과 여성들
영부인 프란체스카


이승만의 리더십을 흔히 ‘가부장적 권위주의’로 규정한 글이 많은데, 바로 그 같은 점을 잘 보여주는 삽화가 하나 있다. 시인 서정주가 1947년 <민중일보> 사장이던 윤보선의 부탁으로 이승만이 살던 돈암장(敦岩莊)을 방문했을 때의 목격담이다.

“조그마하고 가냘프고 유순한 부인(프란체스카)은 묵묵히 명령대로 나가 꽤 오랜 뒤 돌아와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일은 어느 집에서나 가끔 있는 일로 자세히 오래 찾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다음에 와서 가져가겠다 하고 여기를 뜨려 했다. 그러자 이 박사는 침대에서 허리를 반만 일으키고는 들어와 서 있는 프란체스카 부인을 화난 눈으로 바라보며 영어로 ‘겟 아웃(나가)!’ 하고 크게 소리치고는 나보고 거기 앉으라고 했다. 나는 그의 부인이 마치 꾸지람 들은 어린애처럼 풀이 죽어 주춤주춤 물러나가는 것을 보며….”(서정주, <미당 자서전2>, 민음사, 1994)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미국에서 교육받고 오래 생활했다지만 이승만은 젊은 시절을 19세기 말 조선에서 보낸 사람이다. 남존여비의 유교사상이 그의 내면에 뿌리깊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점은 가령 1952년 여성으로서 사법고시에 처음 합격한 이태영(李兌榮)의 판사 임용을 김병로 대법원장이 요청했을 때 “여성은 아직 이르니 가당치 않다”면서 제외했던 사례에서도 발견된다(이태영, <나의 만남, 나의 인생>, 정우사, 1991).

서양인임에도 여필종부(女必從夫)적 성격의 프란체스카 도너를 이승만이 처음 만난 것은 1933년이다. 그해 1월26일 그는 일본의 한국 병탄과 만주 침략을 규탄하는 선전활동을 벌이고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기 위해 국제연맹 본부가 있던 스위스 제네바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때 자신이 묵고 있던 레만 호반의 호텔 ‘드 라 뤼시’의 레스토랑에서 프란체스카를 만났는데, 당시 프란체스카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를 경유해 스위스를 여행 중이었다고 한다. “동양에서 오신 귀빈이 자리가 없으신데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지배인의 말에 모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만은 프랑스어로 “좌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정중히 인사한 뒤 앞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58세, 프란체스카의 나이는 33세였다. 이들은 이듬해 10월8일 뉴욕 몬트클레어호텔 특별실에서 윤병구(尹炳求) 목사와 존 H. 홈즈 목사의 합동주례로 결혼식을 올렸고, 하와이로 건너가 신혼살림을 차렸다. 두 사람 모두 초혼은 아니었다.

프란체스카는 20세 때 오스트리아의 자동차경주 선수였던 헬무트 뵈룅과 결혼했다 이혼한 경력이 있었고, 이승만은 19세 때 남산 우수현(雩守峴) 언덕 아랫동네에 살던 동갑내기 처녀 박승선(朴承善)과 결혼해 아들까지 낳았으나 뒤에 갈라선 경력이 있었다.

첫 부인 박승선

홀어머니 밑에서 글공부도 하고 자란 첫 부인은 “마음씨가 곱고 살림을 잘했다”고 한다. 1899년 이승만이 투옥되자 그는 간난아이를 업은 채 덕수궁 앞에 거적을 펴고 사흘이나 임금에게 읍소해 서울 장안에 열녀라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부부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이, 가령 감옥에 있을 때 아내를 그리며 그가 지은 <규원(閨怨)> 등의 한시 같은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이 박승선과 헤어지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들 태산(泰山)을 두고 박씨 부인은 보내지 않으려 하고, 미국의 이승만 씨는 보내라 하고 그 실랑이가 굉장하였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이들 부부는 어느 결에 사이가 멀어져 갔고, 또 자기와 한 번 틀려 밉게 생각되면 좀처럼 돌보지 않는 성미인 이 박사는 그의 본처 박씨를 외면하게끔 되었던 것”이라고 그 원인을 첫 부인의 뻗대는 성격 탓으로 돌린 자료도 있다(문일신, <이승만의 비밀:박씨 부인은 살아 있었다>, 범양출판사, 1960).

이렇게 미국으로 데려간 아들은 장티푸스에 걸려 14세의 나이에 필라델피아 시립병원에서 죽고 말았다. 아들이 죽은 뒤 첫 부인에 대한 이승만의 정분도 싸늘하게 식었는데, 이는 그가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울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청년부 간사직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수락하고 1910년 10월 말께 귀국했을 때 분명히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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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출국 33년 만에 귀국한 이승만 대통령이 환영대회에 참석했다.

그 무렵 박씨 부인은 남편이 있는 미국으로 갈 생각으로 상동예배당의 서양부인에게 영어를 배우며 따로 살고 있다 남편이 금의환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으나 이승만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남편의 정을 돌려보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이승만이 멀리해 결국 종로 2가 YMCA 부근에 집을 따로 얻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살았다고 한다. 그 후 1912년 이승만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프란체스카를 만나는 1933년까지 21년 동안 이승만은 독신으로 혼자 살았던 것일까? 첫 부인(박승선)과 둘째 부인(프란체스카) 사이에 두 여인이 있었다는 자료들이 있다.

하나는 “이 박사의 대(對) 여인관계는 신비의 베일 속에 싸여 있지만 그가 프란체스카 부인과 결혼하기 전 어떤 미국여자와 동거생활을 했다”는 것이고(신상초, ‘밖에서 본 이승만 박사’, <신동아>, 1965년 9월호), 다른 하나는 임영신(任永信)이 1930년대 초 이승만의 구혼을 받고 10여 일 동안 혼자 번민하다 거절했다는 것이지만(손충무, <한강은 흐른다-승당 임영신의 생애>, 1972), 두 자료의 신빙성은 높지 않다.

오히려 이승만의 여자문제는 깨끗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이승만 자신이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것에 만족해했다. 그래서 1945년 해방되던 날 워싱턴의 신문기자들과 인터뷰에서 그는 “아내의 지혜와 용기, 인내와 슬픔, 노력이 나로 하여금 오늘 이날을 맞게 했다”며 아내의 은공을 치하했다고 한다(<여성신문>, 2007년 1월26일).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1월 초 한국으로 건너온 프란체스카가 조선타이어주식회사 사장 장진영(張震英)이 제공한 돈암장(敦岩莊)에 거처할 때 이승만의 첫 부인이 그곳으로 찾아왔다.

이때 그를 이승만과 상면하지 못하도록 따돌린 것은 이기붕(李起鵬)의 부인 박마리아였다. 박마리아는 한국인 부인에게 남편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던 프란체스카를 안심시키며 변호사 이인(李仁)에게 한국 내 결혼 수속을 매듭짓도록 주선했다. 이 공으로 박마리아는 프란체스카의 신임을 얻어 훗날 남편 이기붕과 함께 ‘서대문 경무대’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주인의 권세가 컸던 것은 프란체스카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그것은 해로했던 그의 생각을 단지 이승만이 존중해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기를 누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점 “여자란 말이 적어야 한다는 남편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왔다는 프란체스카의 진술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승만의 성격
왕손 의식과 엘리트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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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이 1945년 11월 중국에서 귀국한 백범 김구 선생(가운데), 미 군정 사령관인 존 하지 중장(오른쪽)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승만은 백호상(白虎相)이다. 흰 범, 곧 백호는 감춰진 공력이 엄청나므로 산속에 사는 맹호보다 훨씬 고수다. 그래서 누런 범, 곧 황호상(黃虎相)의 김구도 이승만 앞에서는 꼬리를 내려야 했다. 김구뿐 아니라 그 누구도 그의 권위에 도전해 이긴 사람이 없었다.

가령 하와이에서 그와 맞섰던 박용만은 베이징(北京)에서 암살당했고, 통일문제를 둘러싸고 대립을 보였던 김구는 흉탄에 쓰러졌으며, 한강변 30만 명의 인파로 위협적 세를 보였던 신익희는 대선 직전 급서했고,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조병옥 또한 갑자기 병사했다.

또 216만 표의 위협적 득표를 보였던 조봉암은 대선 후 형사(刑死)의 비운을 당했다. 기이하게도 이들 도전자는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 만인을 제압하는 백호의 힘이었을까? 운세만 센 것이 아니었다. 기도 강해 그 앞에 서면 누구나 오금이 저려 옴쭉달싹 못했다고 한다. 비단 프란체스카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돈암장 시절 이승만의 공보비서를 지냈던 분(崔基一)의 회고에 따르면 이승만 앞에서 5분 이상 대등하게 말할 수 있었던 한국인은 없었다고 한다. 만일 상대도 배포가 있어 말을 길게 하면 이승만은 1∼2분도 안 돼 입을 다물라는 뜻으로 두 손을 상대방의 입에 갖다 대고는 했다는 것이다.(최기일,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 <생각의나무>, 2002)

그는 자기에게 도전하는 자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어릴 때 이승만과 가까이 지냈던 신흥우는 6·25 이후 미국교포들로부터 대통령에 출마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래서 1952년 귀국하자 부산 피란지의 이승만 임시관저를 방문했다. 여러 채널을 통해 미국교포들의 동향을 듣고 있던 이승만은 “대통령을 다시 하라는데 나는 할 생각이 없으니 당신이 하는 것이 좋겠어” 하고 신흥우에게 출마를 권했다.

이에 신흥우가 “그럼 믿고 내가 출마하리다” 하고 승낙하니 이승만은 그렇게 하라면서 그의 손을 꼭 붙들었다. 하지만 그 후 신흥우가 무소속으로 출마하자 이승만은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김석영, <경무대의 비밀>, 평진문화사, 1960). 속을 떠보고 도전 의사가 드러나자 옛 친구를 내친 것이었다.

“그분은 오랜 망명생활을 통해 같은 한국사람들 사이에서는 1대1의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갖지 못했다. 같은 한국사람끼리의 인간관계에서는 그의 추종자가 되어 애정을 공급해주지 않는 한 모두 그의 적이 되었다.”(이병윤, ‘정신의학자가 본 이승만 박사’, <신동아> 1965년 9월호).

이 같은 성격이 부모의 과잉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머니(김해 김씨)는 이승만이 여섯 살 때 천자문을 떼자 없는 살림에도 온 동네사람을 불러 잔치를 베풀 만큼 애지중지 키웠고, 아버지(李敬善)는 집안 족보를 강조하면서 아들에게 양녕대군의 16대손이라는 선민의식을 심어주었다.

큰 용이 하늘에서 날아와 어머니 가슴으로 뛰어드는 태몽도 한몫 거들었다. 그래서 초명을 승룡(承龍)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용(왕)을 계승한다→왕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주팔자 같은 것을 풀어보니 늦게 왕이 될 운세여서 ‘늦게(왕을) 계승한다’는 뜻의 승만(承晩)으로 개명한 것이었다.

이처럼 아버지가 심어준 왕의 꿈이 이승만에게 체현되기 시작한 것은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부터였던 것 같다. 한국인 최초의 박사라는 엘리트 의식과 왕손 의식은 그를 보통사람과 달리 백성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게 만들었다. 여기에 3·1운동 후에 얻은 임시정부의 ‘대통령’ 타이틀은 그의 카리스마를 한층 강화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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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가운데)을 환영하고 있다.

카리스마

신약 고린도전서에 등장하는 카리스마(χαρισμα)라는 단어는 본래 ‘성령의 은사’→‘신이 주신 특수한 능력’이라는 뜻인데, 막스 베버는 이를 원용해 카이사르나 나폴레옹처럼 세계사를 움직일 정도로 초인적 자질을 가진 사람에게 피지배자가 절대적 신뢰를 갖고 복종하는 현상을 ‘카리스마적 지배’라고 명명했다.

이승만의 경우도 뚜렷한 비전, 정확한 판단력, 독창성, 분명한 표현력, 그리고 개인적 역량이나 매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카리스마의 소유자임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1920년 말 그가 상하이(上海)에 갔을 때 드러났던 바와 같이 그의 카리스마 리더십이 다 통했던 것은 아니다. 기호파(경기도·전라도)를 중심으로 그를 따르는 무리도 있었지만 동북파(함경도)의 이동휘, 북간도의 국민군, 서간도의 군정서, 하와이의 독립단, 박용만의 국민공회, 신숙(申肅)의 통일당, 신채호·김원봉·장건상 등 연대서명자 54명 등 적지 않은 세력이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유는 국제연맹에 조선의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것이었지만, 아직은 그의 존재가 카리스마적 권위로까지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방증이기도 하다. 이승만은 이 문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카리스마를 시험받기도 했다. 우호세력과 연합세력을 많이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단지 학위를 얻었을 뿐인 그가 실제로는 본격적인 조직생활을 해본 경험도,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몸에 익힐 기회도 가져보지 못했던 탓 아닐까? 그는 머리 좋은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여론을 중시하기보다 자신의 능력과 판단을 더 믿는 경우였다. 결국 이승만은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채 1921년 5월 말 다시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리고 상하이의 경험을 통해 현실정치에서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그 해 7월21일 민찬호·안경현·이종관 등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동지회’를 발족시켰다. 이때 이승만은 “앞으로 여러분은 경찰도 되고, 군병도 되고, 몽둥이도 되어 악한 분자를 처치해야 한다”고 발언했는데, 상하이에서 그가 당한 수모가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동지회는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을 종신총재로 추대하고 그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어떤 모임이든 그 단체의 장은 회원들의 선출을 통해 일정기간 임하는 것이 통례인데, 이승만은 처음부터 영구총재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제왕적 또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취하고 싶었던 이승만의 성격을 발견하게 된다.

세월과 함께 이런 경향은 점점 굳어져갔다. 아마도 그의 카리스마가 가장 빛을 발했던 기간은 그가 귀국한 1945년 10월16일부터 11월16일까지의 한 달간이었을 것이다. 이때 200여 개에 달하던 남한의 좌우 단체가 전부 그의 지도를 받겠다고 모여들었다. 독립협회 시절부터 전해진 그의 명성, 임정 대통령, 71세의 나이, 좌파에서 추대된 인민공화국 주석, 그리고 미군정의 전폭적 지원 등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200여 단체로 구성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에 취임한 이승만은 절대적 카리스마를 지닌 국부(國父)로 떠오르게 된다. 다만 그 기간이 길지는 못했다. 그의 카리스마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였다. 이후 그는 공산당이라면 넌더리를 치게 되었다.



-계속-


강준식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와 미국 일리노이대·플로리다테크대학 등에서 문학·정치학·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196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유신 말기와 5공 중반까지 <시카고·뉴욕 동아일보> <뉴욕 조선일보> 등에서 편집국장·논설주간 등을 지냈으며, 한때는 정치권과 공기업 등에 몸담기도 했다.

저서로는 <서양바람 동양바람> <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김우중의 대도전> <혈농어수(血濃於水)> 등이 있으며, 평역서로는 <쓸모없는 것이 쓸모있다-장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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