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지역감정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1) 함경도, 평안도 지방을 逆鄕이라 하여 인재등용을 억제했고 그 뒤 여러가지 구실을 붙여 전라도 지방 사람을 차별했습니다. 2) 조선후기에 들어 경상도 지방을 남인의 근거지라 하여 소외시켰습니다. 3) 서인 또는 노론의 근거지인 경기도, 충청도의 일부 세력이 정권을 독점하여 쥐고 흔들었습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격으면서 사람들은 각 지역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얕보고 깔보는 의식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지역차별은 대체로 지배세력의 조작에서 나왔습니다. 지배세력은 정치권력이나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지역에 제한을 가하고 민중을 부추겨 지역간의 감정 또는 대결 의식을 유발하였습니다 조선조는 건국 초기부터 단계적으로 지역차별 정책을 폈습니다. 그 배경을 제도와 사례를 들어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고려때부터 지방의 행정구역을 팔도로 나누었는데, 예로부터 팔도에 대한 평이 구구했습니다.
역사서에서 조선시대 지역감정에 대한 찾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천리 되는 물과 백리되는 들판이 없는 까닭에 거인이 나지 못한다. 그래서 중국주변의 여러 오랑캐는 한차레씩 중국에 들어가 황제 노릇을 하였으나 유독 우리나라는 그러지 못했다. 오직 자기 땅덩이만 조심해 지켜서 뜻을 감히 딴데에 두지 못한다" 위의 글은 정약용이 서북의 인재를 버리는 것은 국력을 목조르는것이라고 통탄한 글입니다. 이익은 예부터 서북에 인재가 많았다고 강조했고, 이중환은 지역적으로 기회의 균등을 이루지 못한 사회적 불일치로 말미암아 있는 힘을 다 발휘하지 못한드는 것과 그 능력이 외부로 뻗어 나가지 못했음을 지적했습니다. 함경도는 진흙밭에서 싸움질하는개 (泥田鬪狗)
평안도는 수풀에서 나온 사나운 호랑이 (猛虎出林) 황해도는 돌밭에서 갈이하는 소 (石田耕牛) 강원도는 바위아래 해묵은 부처 (岩下老佛) 충청도는 맑은 바람에 밝은 달 (淸風明月) 경상도는 송죽과 같은 큰 절개 (松竹大節) 전라도는 바람앞에 가는 버드나무 (風前細柳) 경기지방은 거울속의 미녀 (鏡中美人) " 이다............... 위의 글은 조선초기 정도전 또는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평하였다는 한문구절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장수로서 왕씨로부터 왕위를 얻었으므로, 그를 도와준 공신들은 서북 방면의 맹장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나라를 얻은 다음에는 서북 사람들을 높은 자리에 등용하지 말라고 명멸했습니다. 그러므로 평안도와 함경도 두 도에는 3백년 동안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고, 간혹 과거에 급제 했다하더라도 현령 정도였고, 가끔 대간과 시종에 오른 자가 있기는 했으나 이것 또한 드물었습니다. 오직 정평 사람인 김니와 안변 사람 이지온 두사람이 아경에 올랐고, 철산 사람인 정봉수와 경성 사람인 전백록 두사람은 무장으로서 겨우 병사를 지낼 정도 였습니다. 또 나라 안의 풍습이 문벌을 중하게 여겨 서울의 사대부는 서북 방면의 사람들과 혼인 하거나 평등하게 사귀지 않았습니다. 서북 사람 역시 감히 서울 사대부와 더불어 평등한 교제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리하여 서북 두 도에는 드디어 사대부가 없게 되었고, 사대부 역시 그곳에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홍경래의 난은 다른 민란과는 확연히 달랐다. 10년 세월의 치밀한 준비를 거쳐 세력을 규합하고 자금을 모으고 병력을 양성했다. 서자 출신의 상인이자 식자 우군칙, 명망 있는 양반가의 선비 김사용 김창시, 역노(驛奴)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한 부호 이희저, 평민 장사 홍총각, 몰락한 향족 이제초…. 홍경래는 여러 계층의 인물들을 두루 포섭했다. 그러나 이들은 의기(義氣)는 투합하였으나 자발적으로 세(勢)를 불려나갈 ‘민중적 지향점’은 없었다. 혹독하게 말하자면 그들을 묶어놓은 것은 개인사적인 분노와 좌절된 욕망이었다. 이념적 구심점은 부재했다. 홍경래의 유일한 사상적 기반이었던 풍수(風水). 그것은 공간적으로는 관서(關西)라는 지역주의의 한계를 노출했고 시간적으로는 중세의 봉건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었다. 당시의 식자층에겐 비켜갈 수 없는 시대의 덫이기도 했다. 거사 당시 돌린 격문(檄文)을 보자. “조정에서는 서북 땅을 버림이 마치 더러운 흙과 같았다. 권문(權門)의 노비들조차 서쪽 땅 사람들을 보면 평안도 놈이라 일컬었다. 서쪽 땅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치 않겠는가….” 극렬한 지역주의는 일시에 평안도 농민들의 공분을 폭발시켰으나 동시에 다른 지역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했다. 거사 뒤 불같은 기세가 불과 나흘 만에 수그러든 것은 이 때문이입니다. 불만의 결집만으로는 ‘새날’을 밝힐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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