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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tectural Digest

마틴 반 세브렌

매일의 디자인

일민미술관 카페에 가면 테이블 사이 사이에 놓인 의자를 눈여겨보게 된다. 드로잉을 실제 공간에 옮겨놓은 듯 간결한 옆모습을 지닌 의자다.이 의자를 디자인한 사람은 벨기에의 대표적인 디자이너 마틴 반 세브렌(Maarten van Severen)이다. 10년 전, 특별한 메커니즘이나 장식도 없이 그야말로 군더더기 없는 이 의자가 비트라(Vitra) 전시장에 처음 등장했을 때 의자를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03’(정확한 이름은 ‘.03’이다)이라는 의자의 이름부터 특이했지만 무엇보다도 누구든 한번쯤은 슥슥 스케치했을 법한 간결한 형태라는 점이 쟁점이었다. 선으로 그냥 그리는 것은 쉬워도 그것을 실제 제품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어지간한 배짱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03’의 경우도 등판을 지지하는 프레임이 없다는 단순 구조에서 비롯된 기술적인 과제가 있고 판재로 된 형태라서 의자를 집어 들기 불편한 문제도 있었다. 그렇다고딱히 특징이라고 할 만한 요소도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호응을 기대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세계 주요도시의 세련된 공간 곳곳에서 이 의자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것을 보면 간결한 그 모습이 바로 ‘03’만의 탁월한 특징임을 알게 된다.부흘렉 형제(Ronan & Erwan Bouroullec)를 비롯한 유명 디자이너들이 자신이 디자인한 새로운 테이블을 선보일 때면 곧잘 ‘03’ 의자 시리즈로 구색을 갖춘다. 그만큼 ‘03’은 존재감을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기품있는 의자로 인식되어 있다.

‘03’ 의자에서보듯 마틴 반 세브렌은 미니멀리즘 성향이 강한 디자이너다. 장식적인 경향이 두드러졌던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음에도 단순한 디자인을 고집했던 그이기에, 그를 미니멀 디자인을 선보인 대표 인물로 평가하기도한다. 세브렌은 거의 모든 디자인을 최소의 면과 선으로 구현해 내어 구조가 곧 형태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재료에 있어서만은목재, 유리, 알루미늄, 합판, 폴리우레탄 등 다양한 실험을 거듭했다. 그는 ‘촉감(tactility)’을 몹시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03’을 디자인할 때 폴리우레탄을 기본 재료로 사용하여 이전의 플라스틱 의자에서 느낄 수 없는 촉감을 부여했다. 그의 첫번째 대량 생산 가구이기도 했던 ‘03’의 성공에 힘입어 그가 만든 의자는 ‘07’까지 시리즈로 이어졌다.


그 중에서 ‘04’는 업무용 회전 의자로 발전된 모델이다. 회전 의자를 제조하는 가구회사들이 한창 등판과 좌판을 분리시켜서 등판이 뒤로 넘어가는 다양한 메커니즘(tilting mechanism)을 고민할 때 그는 가장 기본적이고 전통적인 등판과 좌판의 일체형을 고집했다. ‘03’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앞뒤는 물론 좌우로도 움직이는 독특한 방식을 도입했다. 의자 디자인의 혁신이 그의 손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이 방식을 라운지 체어 디자인까지 끌고 갔다. 비트라를 위해 디자인한 ‘MVS Lounce Chair(MVS 라운지 체어)’는 라운지 체어의 특징인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카르텔(Kartell)사의 ‘LCP Lounce Chair (LCP 라운지체어)’는 딱딱한 아크릴 판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뻣뻣하게만 보이는 ‘MVS’는 두 가지 자세로 변형이가능하도록 만들어졌고 딱딱하게만 보이는 ‘LCP’는 하나로 이어진 판재의 자체적인 탄성을 응용해새로운 방식의 안락함을 보여주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유형의 의자는 성형합판이나 사출 플라스틱으로 가공된 골격에 천과 가죽을 씌우는 형식으로 제작되지만 반 세브렌은 우레탄, 아크릴 판재를 별도의 마감재 없이 그 자체로 완성시켰다. 걷어낼 수 있는 것은 최대한 걷어내고 핵심적인 것만 남겨두는 그의 디자인 원칙을 두고 비트라의 회장인 롤프 펠바움(Rolf Fehlbaum)은 이렇게 말했다. “반 세브렌은 미니멀리스트가 아니라 에센셜리스트(essentialist)다.”

마틴 반 세브렌은 건축을 전공했지만 인테리어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고 렘 콜하스(Rem Koolhaas) 같은 건축가들의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인테리어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유럽에서의 전시와 가구 디자인을 통해 주목 받게 되자 소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그에게 디자인을 의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용적인 디자인을 고집한 반 세브렌은 디자이너의 이름을 브랜드처럼 사용하는 이른바 ‘디자인 제품(design goods)’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가구를 제외하고 그가 디자인한 소품이라고는 알레시(Alessi)의 식기가 거의 유일한데 그마저도 스타일이 아니라 탄탄한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식기 디자인이었다.


진보적이면서도 냉정하리만치 엄격한 단순함의 미학을 보여주는 그의 새로운 디자인을 더 이상은기대할 수 없다. 2005년, 한창 활동할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암 투병 중 그가 마지막으로 기획한 회고전이 사망 즈음에 그의 고향인 벨기에 헨트(Ghent)의 디자인 뮤지엄에서 열렸고 지금도 네덜란드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순회전으로 열리고 있다. 비록 전시는 보지 못하더라도,그의 분신과도 같은 ‘쿨’한 의자들은다양한 공공기관과 상업공간에서앞으로도 쉽게 만날 수 있을 테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매일의 디자인>은 한국디자인문화재단과 함께합니다.

김상규
대학과 대학원에서 디자인을 전공했고 몇몇 기업과 기관에서 디자이너와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번역서와 저서로는 [사회를 위한 디자인], [디자인아트], [한국의 디자인](공저) 등이 있으며, [AND Fork]의 공동 큐레이터 겸 필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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